Google 사이트 확인: googleef0228e99f38e49a.html google-site-verification: googleef0228e99f38e49a.html 백령도의신비 아름다운섬 백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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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초 비박 스토리

백령도의신비 아름다운섬 백령도

by 만초대박 202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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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 선대암에 붙어 있던 가마우지 떼가 새카맣게 날아올랐다.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물범바위에서 쉬고 있던 점박이물범들이 꾸물꾸물 인당수 바다 깊숙이 들어갔다. 남포리습곡의 괭이갈매기들도 덩달아 시끄럽게 울어댔다. 백령도에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든 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다. 인민군을 피해 목숨을 걸고 인당수 바다를 건넌 사람들이었다. “내 금세 돌아 오갔시오.” 배에 오르며 고향의 부모, 처자식에 남긴 그 말이 생전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 이대기(李大期, 1551~1628)는 백령도로 귀양 와서 쓴 <백령도지>에서 백령도를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두무진 형제바위 사이로 백령하늘이 붉게 노을지고 있다.

NLL(북방한계선)과 3.8선.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남과 북 사이엔 두꺼운 장벽이 쳐졌다. 시간이 흐르며 인천이나 태안 같은 육지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백령도에서 불과 10여km 앞,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가지 사람들은 그대로 백령도에 뿌리를 내렸다.


▲ ‘인천~백령도’를 이을 백령공항이 진촌리 간척지구에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이 부지는 옹진군농업센터 종묘장, 시범단지, 해당화재배지역으로 활용중이다. 사진은 백령공항 예정부지를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6.25때 황해도서 백령도로 건너온 사람들, 고향생각하며 만든 ‘백령냉면’ 탄생

고향땅을 바라보며 실향민들은 고향의 음식을 만들어먹기 시작했다. 가족과 오순도순 둘러앉아 만들어먹던 고향음식이 그나마 수구초심의 애달픔을 위로해주었다. ‘평양·함흥 랭면’을 모태로 한 ‘백령냉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 백령도는 국가지질공원으로 천혜의 자연경관을 품고 있다. 지질공원 가운데 한 곳인 남포리습곡에 솟아 있는 ‘용틀임바위’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모가 황해도 송해군에서 백령도로 피란온 김무남(63)씨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 냉면을 만들어주셨다”며 “냉면을 먹을 때면 고향얘기를 하시며 눈시울을 붉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재배한 메밀로 면발을 만드는 백령냉면은 그 식감이 냉면과 국수의 중간 정도로 쫄깃하면서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한우잡뼈나 돼지뼈를 푹 고아 우려낸 육수에 까나리액젓과 들기름을 곁들여 먹는 그 맛이 일품이다. 메밀 피에 백령도 굴과 김치를 넣어 커다란 만두처럼 빚어내는 짠지떡, 부치기(녹두부침개), 삶은돼지고기도 백령도 대표음식이다.




▲ 백령도의 특산명품은 ‘까나리액젓’이다. 김치를 담그거나 백령냉면에 뿌려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사진은 까나리를 하역하는 모습(사진 위)과 까나리를 끓이는 가마.

주민 90% 농사, 까나리· 전복· 굴· 홍어· 꽃게 등 싱싱한 해산물 풍부

백령도 주민의 90프로는 농사로 먹고 산다. 바다에서 삶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은 10프로 정도이다. 논밭을 일구는 것과 함께 백령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전복과 홍어, 꽃게를 잡고 돌김, 홍합, 굴과 미역을 채취하며 삶을 이어왔다.


▲ 하늬해변에서 한 주민이 굴을 채취하고 있다.


▲ 2022년 6월 하늬해변에서 굴을 따던 김순이(88) 할머니가 자신이 채취해서 깐 굴을 보여주며 “맛을 보라”고 권하고 있다.

지난 6월 하늬해변에서 굴을 따던 김순이(88)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굴을 까주며 “백령도 굴뽕이(굴)는 맛이 달고 담백하다”며 “칼국수에 넣어 끓여먹거나 굴전을 해 먹는다”고 말했다. 백령도에선 메밀칼국수에 굴을 넣어 걸죽하게 끓여내는 ‘장촌칼국수’집이 유명하다. 장촌칼국수집은 본래 장촌리에서 시작했으나 현재 진촌리로 이전한 상태다. 인천에 있는 백령도식당에서도 자연산 굴을 넣은 칼국수를 맛볼 수 있다.

김 할머니 바로 앞 바다에선 몇 명의 남자들이 잠수복을 입은 채 ‘자무질’(잠수)을 하며 ‘미역을 매고’(미역을 채취하는 일) 있었다. 낫을 이용해 바윗돌에 붙어 자라는 미역을 잘라낸 다음엔 깨끗이 손질해 쨍한 햇볕과 선선한 해풍에 잘 말리는 게 중요하다.


 

까나리액젓 만들 때 쓰던 소금 생산 ‘화동염전’ 문 닫고 ‘로프솔트’로 천일염 만들기 시작

백령도 하면 ‘까나리’를 빼 놓을 수 없다. 까나리액젓은 김치를 담글 때는 물론이고 나물 무침 등 여러 반찬에 넣어 먹는 필수양념이다. 까나리와 소금을 3대 1의 비율로 담가 1년 이상 숙성시키면 맛있는 까나리액젓이 된다. 백령 까나리액젓은 수협 심벌마크와 한국전통식품 품질인증을 받을 정도로 맛과 위생이 뛰어나다. 까나리를 말려 졸여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다.

오래전부터 까나리액젓을 만드는데 쓰는 소금을 만들어낸 곳이 ‘화동염전’이다. 바닷물을 끓여 햇볕에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소금을 만드는 천일염 방식의 염전이었다. 백령도의 대표적 염전이던 화동염전은 3년 전 폐염전이 되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로프솔트’ 생산방식이다. 로프를 이용한 증발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것인데 백령도의 신선한 해풍과 햇볕으로 생산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미네랄이 풍부하다. 청정해역의 무공해 천일염으로 주민소득 증대에 기여할 것으로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백고구마’ 또한 백령도 특산품이다.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두면 당도가 높아지고 식감도 부드러워지는데 햇볕에 숙성되는 고구마를 하나씩 빼 먹는 맛이 쏠쏠하다. 1960~1980년대 백령도엔 홍어와 전복, 해삼, 가리비를 잡는 해녀까지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어업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 백령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기독교 장로교가 세워진 곳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 중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이다. 기독교가 시작된 ‘중화동교회’가 선명한 흑백사진 같은 하늘 아래 오롯이 서 있다.

157년 역사 ‘중화동교회’,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 등 볼거리 즐길거리 많아

백령도 주민 가운데 종교인의 상당수는 기독교인이다. 이는 중화동교회와 연관이 있다. 중화동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다. 1832년 7월 독일태생 유태계 선교사 귀츨라프(Karl F.Gutzlaff, 곽실렵)는 백령도에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을 남겼다. 기독교사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최난헌) 선교사도 1865년 백령도를 방문했다.

개화사상을 가진 참사 허득 공(公)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소래교회 서경조 장로의 도움을 받아 백령도에 유배됐던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과 함께 한학서당에 교회를 열었는데 그게 중화동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옆 ‘백령기독교역사관’에선 한국기독교 100년의 역사를 볼 수 있다.

효녀 심청 설화가 탄생한 곳이 백령도다. 앞을 보지 못 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심청이가 치마폭을 뒤집어쓴 채 풍덩 몸을 던진 인당수는 백령도 서북쪽 두무진과 북한 장산곶 중간 지점이다.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 용궁에 갔다가 타고 나온 연꽃이 걸려있던 연봉바위, 연꽃이 떠밀려왔던 연화리는 심청이의 흔적으로 남았다. ‘심청각’과 ‘심청테마파크’에 가면 심청이의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다.

백령도는 6.25때 활약한 동키부대 막사가 남아 있다. 동키부대는 1951년 백령도로 피란온 황해도 출신 1000여 명의 청년들로 조직한 무장의용대였다. 동키부대는 적지에서 동조자 규합, 지하조직 구축, 첩보수집과 태업, 적해안선 봉쇄 등의 유격전을 전개하며 북한군에 치명타를 입혔다. 동키부대의 활동영역은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강화도 하구에 이르는 30여개 섬과 구월산, 멸악산 등 황해도내륙에 이르기까지 광범했다. 당나귀를 뜻하는 동키(donkey)는 미군이 지급한 무전기가 당나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백령도는 전복, 굴, 미역, 홍합, 꽃게 등 싱싱한 해산물로 넘쳐난다. 사항포구에서 어민들이 통발로 잡은 꽃게를 내리고 있다.

술 한 잔으로 여럿이 돌려가며 마셔, 동네 어른들 누구나 ‘엄마, 아부지’ 호칭

백령도에선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실 때 잔을 내려놓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 계속 돌려가며 마시는 독특한 술 문화가 있다. 술잔이 오면 잔을 내려놓지 않고 단숨에 비운 뒤 그 잔을 곧바로 옆 사람에게 바로 건네는 것이다. 안주도 술을 따라준 뒤 먹어야 한다.

백령초등학교 박형원(54) 교장은 “백령도엔 예전에 술을 들여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며 “어쩌다 술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공평하게 먹기 위해 잔을 돌리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이런 술문화는 사라지는 추세다. 백령도 사람들은 부모 연배인 노인들에겐 ‘엄마’ ‘아부지’라는 호칭을 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다보니 마을사람들이 가족같이 지내며 자연스럽게 이런 호칭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부터 사람 정착, 삼국시대 이래 군사요충지이자 유배지, 중국교류 거점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 백령도의 지명은 조금씩 변해왔다. 고구려 영토에 속했던 시기엔 ‘고니섬’이란 뜻으로 고니 곡(鵠)자를 써서 곡도라 불렀다. 고니 떼가 많이 왔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백령도’(白翎島)라 부르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 부터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령도는 중국과의 교류거점이자, 서해를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고려 현종9년(1018)에 백령도엔 진(鎭)을 두었는데 백령도의 중심마을인 ‘진촌’(鎭村)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세종10년(1428)에는 목장을 설치해 군마를 키웠으며 수군첨절제사가 파견돼 진지를 지켰다. 6.25전쟁 때엔 미군부대가 주둔했는데 진촌리 우물터에 있는 동키부대 표식이 그 증거이다. 구한말까지 황해도 해주에 속했던 백령도는 1945년 광복과 함께 남한의 옹진군으로 들어왔다.

백령도는 유배의 섬이기도 했다. 고려는 개국공신이자 왕건의 오른팔이던 유금필을 이 섬으로 유배를 왔으며 <동국여지승람>은 고려 충숙왕10년(1323)엔 중국 원나라 발라태자가 귀양을 왔다는 기록을 전한다. 조선 광해군 12년(1614) 백령도에 귀양 왔던 이대기는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며 <백령도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백령도를 묘사했다. 지금도 바람이 세고 안개가 끼면 배가 뜨지 않기 때문에 백령도에 들어갔다가 며칠 동안 유배생활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최북단에 솟아 수천 년 동안 온갖 세파와 풍랑을 이겨내며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섬과, 묵묵히 그 섬을 살아가는 사람들. 밤새도록 세차게 불어온 강풍과 짙은 안개가 걷히자 아침햇살을 받은 백령도가 눈부시게 빛난다. 물범과 괭이갈매기, 가마우지의 울음이 ‘바다의 협주곡’으로 황해에 울려 퍼진다.

글 김진국 본지 총괄국장, 사진 홍승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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