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먼 섬 옹진군 덕적면의 울도(蔚島)로 가는 여정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바다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게 했다. 울도로 떠나는 그날 서해 바다는 안개주의보로 배들의 운항이 멈춰진 상태였다. 다행히 1시간 정도 지연이 된 뒤 덕적도 가는 배가 출항했고, 오전 11시 20분에 나래호를 탈 수 있었다. 덕적면의 작은 섬들을 도는 완행배편 나래호에 몸을 실은 지 1시간 20분 만인 낮 12시40분, 마침내 울도에 발을 내딛었다.

▲ 울도는 덕적군도의 남쪽 끝 섬이다. 덕적군도 중 육지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지만 반대로 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들 입장에서 보면 가장 먼저 닿는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섬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춰 거친 파도와 태풍, 해일로부터 배를 안전하게 지키는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해왔다. 울도 앞 바다는 방파제가 쳐져 있어 배들의 피항지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은 방파제 위에 서 있는 빨간색과 흰색의 등대 모습.
32가구 40여 주민 거주,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령층
새로 만들었다는 울도 선착장은 좁고 작았다. 먼 섬이라서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다. 작은 선착장에는 마을버스가 대기하며 관광객들과 마을주민들을 태웠다. 이 버스는 섬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생활편의를 제공하고자 마련됐다. 버스를 타면 5분 내외로 마을에 도착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 20여분 이상 소요된다. 주민들은 해안가에 조성된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울도란 이름은 섬 주변이 파랗게 울타리처럼 쳐져 있어서 지어졌다는 얘기도 있고, 사람들이 너무 순박해 한번가면 정이 들어 울고 나온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 지금은 폐교가 된 덕적국민학교 울도분교 교사. 학교는 나무덩굴에 뒤덮인 채 무심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울도는 해안가 주변으로 32가구, 40여명의 주민이 산다. 대부분이 60대 이상으로 60대가 젊은 축에 속한다. 젊은 사람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로 교회목사, 발전소 직원들이다. 주요시설로는 등대(3개), 보건소, 치안센터, 한전, 천주교 공소, 교회가 있고 울도행정지원센터가 건립 중이었다. 초등학교는 89년에 폐교됐다. 덕적국민학교 울도분교였다. 아이들이 줄면서 학교는 없어졌지만, 녹슨 철봉, 학교건물은 나무덩굴에 뒤덮인 채 무심하게 흘러버린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 모습. 32가구 40여명의 주민들이 해안가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울도의 해안도로는 백중사리가 되면 바닷물에 잠겨 사람이나 차가 다닐 수 없다. 바닷물이 넘쳐 미끄럽고 위험해 사리때는 객선을 구 선착장에 댄다. 그래서 지금 해안 도로를 높이는 공사가 한창이다.
울도 등대에서 조망되는 덕적면의 섬 풍경 ‘압권’
울도는 덕적군도의 남쪽 끝 섬이다. 덕적군도 중 육지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지만 반대로 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들 입장에서 보면 가장 먼저 닿는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섬은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춰 거친 파도와 태풍, 해일로부터 배를 안전하게 지키는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해왔다. 울도 앞 바다는 방파제가 쳐져 있어 배들의 피항지로 활용되고 있다. 방파제 위에 서 있는 빨간색과 흰색의 등대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위해 매일 밤 바다에 불을 비춘다.

▲ 울도 등대위에서 바라본 덕적군도의 모습. 마치 섬들의 정원을 펼쳐 놓은 듯, 풍광이 압도적이다.

▲ 울도 등대로 올라가는 길은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시원하다. 약 40~50분 가량 올라야 한다.
울도 정상에는 울도등대가 서있다. 해발 120m에 위치한 이 등대는 마치 그리스 신전을 보는 것처럼 신성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등대가 있는 산 정상에서는 덕적면 섬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마치 섬들의 정원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요즘 말로 풍경 ‘맛집’이다. 여기서는 덕적군도의 섬 뿐 만 아니라 충청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등대에서 내려와 능선을 타고 조금만 가면 팔각정이 있어 쉬어갈 수 있다. 팔각정 자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배들에게 항로를 알려주고자 횃불을 올렸던 장소다. 등대로 가는 오솔길은 나무가 우거져 시원하다. 등대까지는 40~50여분 정도 올라야 한다.


▲ 울도 '목넘어' 해변은 작고 앙증맞은 몽돌들이 넘쳐난다. 이곳은 마치 화산의 침식작용이 일어났던 것처럼 기암괴석과 절벽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울도의 ‘목넘어’는 마을앞 해변과는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은 소나무 숲이 울창한데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일본 순사들이 섬에 소나무씨를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목넘어 산에서 내려다 본 울도 해변은 마치 이곳에서 화산의 침식작용이 일어났던 것처럼 기암괴석과 절벽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발을 잘못 디뎠다간 큰일 날 것 같은 아찔한 낭떠러지다. 목넘어 해변은 작고 앙증맞은 몽돌들이 넘쳐난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자그락 자그락’ 돌 구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섬은 어여쁜 야생화들의 천국이다. 특히 나리꽃이 군락으로 핀 곳이 많았다.
새우가 너무 많이 잡혀, 돈도 사람도 넘쳐났던 섬
울도는 서해 먼 바다의 외로운 섬처럼 보이지만 섬의 역사와 이야기는 바다처럼 깊디깊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이후까지 새우파시로 유명했다. 울도 젓새우가 너무 많이 잡혀 전라도, 충청도 배들이 이곳에서 모여 새우를 잡았다. 김용숙(89) 할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바다에서 선원들이 ‘어이여~어이여~’노래를 부르며 새우를 잡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 울도 주민들이 마을 앞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있다.
새우파시로 새우가 넘쳐나자 온 섬에서 새우를 삶고, 해안가에서 말렸다. 새우 때문에 섬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금도 건어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임시거주지 흔적인 ‘막터’가 해안가 주변으로 간간히 남아있다. 삶은 새우는 해안가에 가마니 두 장을 붙여서 만든 ‘깔치’ 위에 펴서 말렸다. 새우를 말렸던 건하장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젓새우를 삶을 때 아궁이를 만들고 석탄을 땠던 석탄재의 흔적들만 산기슭에 소소하게 남아있었다.

▲ 정광성 할아버지가 새우파시가 있었을때 건어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살던 임시거주지인 막터의 흔적을 가리키고 있다.
새우파시로 돈이 넘쳐나던 시절 울도 작은마을에는 기생들의 노래와 장구소리가 넘쳐흘렀다, 술집과 색시집들이 100여개나 있을 정도였다. ‘덕적면의 돈은 다 울도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돌았다. 여인숙, 파출소, 사진관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돈 되는 고깃배를 따라 다니던 철새들이었다. 젓새우 잡이는 주로 봄과 가을에 이뤄졌고 당시에는 그물만 치면 젓새우가 터져나갈 듯이 잡혔다.
덕적 8경 중 울도어화(蔚島漁火)라는 말이 있다. 울도 주변에서 밤에 새우 잡이 배들이 밝힌 불빛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광을 지칭한 것이다.

▲ 울도 전경. 덕적도 남방 17㎞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덕적면의 가장 남쪽 끝 섬이다.
정광성(86) 할아버지는 “예전엔 봄, 가을로 새우파시가 있었는데 낮이고 밤이고 배들이 조업을 했었다”며 “새우를 잡으면 바로 네모진 큰 가마솥에 넣어 데친 뒤 말려서 중국과 직무역을 했다”고 말했다. 중국 배는 돛대가 4개가 달렸었는데 울도와 충청도 사이로 다녔다고 한다. 중국과 무역은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끊어졌다.
꽃게 그물 정리해서 번 돈으로 자식 공부 시키고, 인천에 집 사
새우파시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더 이상 새우가 잡히지 않자 마을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새우가 지나간 뒤 울도의 주민들을 먹여 살린 건 꽃게였다. 1970년대부터 2000년 이전까지 울도와 백아도 바다 뒤에서 꽃게가 많이 나오자 어선들이 다시 울도 주변으로 몰렸다. 울도 바다에서 잡은 꽃게는 바로 포장해서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수출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꽃게 수요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 울도 주민은 꽃게의 원조는 울도라고 말한다.
울도 주민들은 꽃게잡이에 필요한 그물을 정리하는 일로 돈을 벌었다. 주민들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대부분 그물 손질에 참여했다. 얽히고 꼬인 채로 뱃사람들이 가져오는 그물을 손질해서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이다. 그 대가로 당시 개당 3000~4000원을 받았다고 한다. 손놀림이 빠른 사람은 하루에 10개 이상 손질을 했다. 울도 사람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그물을 풀고 다듬어 번 돈으로 자식들을 뭍에서 공부를 시키고 인천에 집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침몰된 청나라배 고승호의 은화, 은괴 찾기로 오랫동안 시끌벅적
침몰된 청나라배 ‘고승호’에 대한 이야기가 울도주민들 사이에 오랫동안 흘러 다녔다. 이 배에 엄청난 보물이 실려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외지사람들이 섬을 들락거렸다. 청나라 배인 고승호는 1894년 7월 25일 일본군함에 의해 침몰되어 울도 앞 바다에 가라앉았다. 여기에 은괴와 은화가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100여년 가까이 보물찾기 시도가 있었다. 여러 번의 수중 발굴 작업 끝에 고승호에서는 은괴, 멕시코은화, 도자기파편, 금·은수저, 포도주 등이 발견되었다. 이중 멕시코 은화는 상당한 가치가 귀중품이어서 화제가 되었고 은괴는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유창호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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